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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or발칸/보스니아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 사라예보..라틴다리.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서 오전 관광을 마치고  보스니아 국경 통과중...2시간 조금 넘게 이동...



점심식사후 3시간정도 이동...중간에 잠시 소나기 비슷한 비가 오기도...


보스니아의  사라예보 진입 중...

점심을 먹은 슬리폰스키 브로드에서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로 가는 도로는 이번 여행중 가장 협소한 도로로 이동했다...

1973년 사라예보 탁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해 우승한(세계대회 최초의 우승이라 함) 이에리사선수 일행이

이 길을 지났다는 박샘의 설명을 들으니 감회가 남다르다...

 

사라예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티토가 이끈 유고슬라비아 연방 보스니아 수도였던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러나 유고연방이 해체되면서

보스니아를 에워싸고 있는 나라의 세르비아 사람과 크로아티아 사람...그리고 회교도들의 사이에 내전이 일어나

지금은 옛 모습을 찾아 볼 수없는 페허로 변하고 말았다... 


보스니아 지역은 유럽의 화약고라고 불리울 정도로 각종 전쟁의 불씨가 도사린 지역이고..

90년대 일어난 보스니아 내전이라든가 러시아의 침입에 항상 긴장 상태로 있어야 하는 아픔을 지닌곳이기도 하다.

발칸반도가 "유럽의 화약고"라고 불리게 된 이유는 수백년을 거슬러 오르는 역사적인 이유가 있다.

예로부터 발칸반도는 지리적인 여건상 동서 문명이 끊임없이 충동했으며,

그로인해 수없이 외세의 침입을 받았었다.

분명 전쟁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사라예보하면 선입견이 퍽 좋은곳은 아니다..

막상 이 도시에 들어와 보니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이 끔찍한 내전의 흔적이 뚜렷이 남은 페허가 된채 방치된 건물들이다...

이곳저곳에 선명하게 나아있는 총탄자국과 앙상하게 뼈만 남은 모습들...

한적하고 평온한 도시의 풍경이지만...

내전으로 인한 참혹함을 느낄 수있어...전쟁을 격어본 세대는 아니지만... 

잔뜩 찌푸린 잿빛하늘로 인해 이 도시를 돌아보는 내내... 나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사라예보는 트레베치산 기슭을 흐르는 밀라츠카강의 좁은 골짜기에 위치해 있다...



600년에 걸친 터키의 지배는 그들 문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 볼때

오늘날의 민족적 갈등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그 역사적 이유들의 중심에 보츠니아와 세르비아 사이를 흐르는 드리나강의 다리가 있다.

그 다리는 바로 동서간의 땅의 연결뿐만 아니라 문화의 연결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사라예보는

이슬람적 특성이 강한 많은 모스크를 비롯해 내부가 장식된 목조주택과 옛 투르크인들의 장터가 있고,

시민의 절반이 이슬람교도이다.




드디어 1차세계대전의 발발 원인이 되었던 장소인 라틴다리에 서 있다...


쇠퇴의 길을 걷고 있던 오스만제국이 1850년 사라예보를 행정의 중심지로 삼았고,

이는 1851년 유혈폭동을 유발시켰다.

오스트리아 - 헝가리제국이 1878년 투르크를 축출하고.. 1908년에 보스니아와 헤르체코비나를 공식적으로 합병하자,

믈라다보스나 저항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운동은 보스니아의 세르비아인인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왕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난트대공와 그의 부인을 암살했던

1914년 6월28일 절정에 달했다.


1914년 6월28일.

사라예보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그런데 갑자기 총소리가 한가로운 거리를 뒤 흔들었다.

길 모퉁이를 돌던 호화로운 승용차가 잠깐 멈칫거렸다.

승용차안의 두 사람이 총에 맞아 쓰러졌고...이 두사람은 다름아닌 오스트리아제국 황테자 페르난트와 아내 조세핀이었다.

총을 쏜 사람은 열아홉살 먹은 세르비아 청년 가브릴로 프린시프였다.

프린시프는 곧 바로 붙잡혔고 황태자부부는 15분 남짓 지나 숨을 거두었다고...



황태자 부부는

라틴다리 끝 오른쪽에서 저격을 당했는데...

그 곳에서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박물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