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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or발칸/폴란드

[폴란드/아우슈비츠]오시비엥침(아우슈비츠) 유대인 강제수용소...



이번 동유럽 여행은 고교동창인 이종덕 부부와 함께하는 여행이다.

종덕친구의 장기근속 휴가 덕분에 동유럽을 출발하는 계기가 됐다..

 

인천공항 출발하여 11시간30분에 프라하 루친공항도착...

프라하에서 석식후 부르노로 2시간 30분소요 버스이동..

유럽 최초의 문화도시로 지정되어 많은 관광자원이 보존되어 있는 폴란드 크라카우 오이시비엥침으로 이동..


쉰들러리스트의 촬영지로 유명한 오시비엥침 (아우슈비츠) 유태인 강제수용소 관광...


 제1수용소 정문 "ARBEIT  MACHT  FREI"  글자의 뜻은 즉 "일하면 자유로와 진다"라는 기만적인 문구이다

 

유럽의 각 나라 학생들은 이곳 아우슈비츠에 많이 와서 역사의 현장을 견학한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인들은 이 곳을 잘 오려하지 않는단다.

독일인들과는 달리 진실을 보기가 두려운가보다.

 아우슈비츠는 전체28동으로 되어 있고 유태인 150만 명을 포함해 약 40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곳이다.

처음 정치범 수용소로 출발해서 유태인 학살 장소로 되기까지 히틀러 정책에 반대편에 있던

 정치범이라던지,유태인을 보호했던 일 시민돌에 이르기까지,

폴란드 사람들도 많이 희생됐다는 사실도 놀라웠는데,

독일인 민족우월주의에 빠져 장애인을 용납하지 못해 수 많은 독일 장애인이 이 곳에서 죽어 갔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곳에 풀란드인이 제일 많이 ,다음은 유태인,

그리고 독일인 순으로 방문객이 많다고 한다.

 

브졔진카(제2수용소)에서 발견된 사체를 화장한 재가 용기에 담겨져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고 있다

 

 

 제2 제3 수용소는 전쟁 중에 전소되어 볼 수 없었지만 제2수용소는 제1수용소의 10배 되는 크기로

한 번에 2천 명까지 죽일 수 있는 가스실을 4개나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제2수용소에는 "쉰들러 리스트" 나  "인생은 아름다워" 에서 볼 수 있었던

기차가 바로 앞까지 들어오게 되어 있어 본격적인 인종 말살 정책을 계획하고 벌였다고 한다.

 

주인을 일찍이 보내고도 여전히 남아서 주인의 불행했던 삶을 보여주고있다.

저 신발의 주인들은 일찌기 세상을 떠났건만...

신발은 남아서 역사를 찾는 이들에게 울컥하는 슬픔을 남겨준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아프다...

 

 

 

 

 

 

 아우슈비츠 곳곳에서 볼 수 있었던 감시 초소.

 고압전류가 흐르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가스실...

시체 소각실.. 하루에 500구 시체를 소각하였다고..


   폴란드 남부 크라코프에서 서쪽으로 50㎞ 지점에 위치한 아우슈비츠(Auschwitz)

문명을 배반한 야만의 극치이며 인류가 저지른 가장 잔혹한 행위의 흔적이다.

 

독일 나치가 저지른 유대인 학살의 상징인 강제수용소로 잘 알려져 있는 아우슈비츠는

원래 인구 5만 명의 작은 공업도시로, 폴란드어로는 오시비엥침이라고

 한다. 이 도시의 외곽에 위치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로워 보인다. 

하지만 수용소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생지옥을 만나게 된다.

학살한 시체를 태웠던 소각로,

 카펫을 짜기 위해 모아둔 희생자들의 머리카락,

유대인들을 실어 나른 철로,

고문실 등이 끔찍했던 광기의 역사를 전해 준다. 

 

1940년 봄, 친위대 장관인 하인리히 힘러가 주동이 되어

가시철망과 고압전류가 흐르는 울타리, 기관총이 설치된 감시탑을 갖춘 공포의 강제수용소를 세웠다.


그 해 6월 최초로 폴란드 정치범들이 수용되었고,

1941년 히틀러의 명령으로 대량살해시설로 확대되었으며,

1942년부터 대학살을 시작하였다.


열차로 실려온 사람들 중 쇠약한 사람이나 노인, 어린이들은 곧바로 공동샤워실로 위장한 가스실로 보내 살해되었다.

 

이처럼 가스, 총살, 고문, 질병, 굶주림...

심지어는 인체실험을 당하여 죽은 사람이 400만 명으로 추산되며, 그 중 3분의 2가 유대인이다.

희생자의 유품은 재활용품으로 사용했고,

장신구는 물론 금니까지 뽑아 금괴로 만들었으며, 머리카락을 모아 카펫을 짰다.

 뼈는 갈아서 골분비료로까지 썼으니 사람의 몸뚱이 중 버릴 것이 하나도 없었다.  

 

1945년 1월,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나치는 대량학살의 증거를 없애기 위해 막사를 불태우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그러나 소련군이 예상보다 빨리 도착해 수용소 건물과 막사의 일부가 남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7년 폴란드의회에서는 이를 박물관으로 개조해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 줄무늬파자마를 입은 소년"의 촬영장소로도 알려진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