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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실크로드

투루판...화염산 차창 관광후 궁금했던 베제크리크 천불동으로 ~


화염산 끝자락 풍광이 좋은 대협곡을 따라 내려오다 협곡이 끝나는곳에 작은 회교마을 마자촌이 나온다

기원전 1세기 흉노족에 의해 투루판이  차사전국(수도가 교하고성)에 세워지고...실크로드길을 따라 차사전국에 불교가 전래되었다.

차사전국은 불교를 국교로 삼았으며...5세기 중반 고창국이 들어서면서 불교가 왕성해 진다.


1~13세기... 이곳에서 30km떨어진 곳에 위그르어로 "아름답게 장식한 집"이라는 뜻을 가진 "베제크리크 천불동"과

토욕구 대협곡에는 수많은 석굴사원이 조성되었으며... 마자촌은 불교성지가 된다.

 



고온 건조한 기온에다 봄이면 강풍이 몰아쳐 예부터 이곳은 불의 땅(火洲), 모래의 땅(沙洲), 바람의 땅(風洲)이라고 불렸다.

고온은 포도나 면화 같은 특산물을 낳았고,

건조한 기후는 카레즈 같은 관개시설을 발달시켰으며,

바람은 문명의 소통을 촉진시켰다.

돌궐어로 ‘풍요로운 곳’이라는 투루판은

사방이 높은 산들로 에워싸인 사막 속 작은 분지 오아시스다.

총 면적 5만 평방킬로미터 중 80퍼센트인 4만 평방킬로미터는 고도가 해면보다 낮다.

높은 산들로 에워싸이고 고도마저 낮으니 여름의 화기(火氣)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라고 한다.

연평균 강우량은 겨우 16 밀리밖에 안 되며... 한 여름 낮 기온은 40도를 웃돌고 지열까지 합치면 80도 가까이 된다.

계란을 땅에 묻어 두기만해도 삶은것 처럼 익는다고...

토욕구 천불동으로 향하던 도중 〈서유기〉에 나오는 화염산이 나타났다.


<서유기〉에서 삼장법사는 손오공 등을 데리고 불경을 구하러 인도로 가는 도중에 서역에서 거대한 불구덩이 같은 화염산을 만난다.

삼장법사일행은 화염산의 엄청난 화기를 손오공이 칠선공자가 가지고 있는 파초선을 빌려 불을 끄고 다시 서역으로 향한다.


요즘 세계곳곳에서 한 여름 50도를 육박했다 하지만 ...

약 40여년전에 이곳의 최고 온도가 48.5도를 기록한적이 있다하고...그때 지면온도가 82.3도에 다달았다고 하는데

이렇게 높은 온도를 유지하는 이유는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분지가 태양을 향해 기울어 있기 때문이라네...

해질녁 서향빛을 받으면 화염산의 붉은빛이 빛을 발해 마치 불이 타 올라가는 것 처럼 보인다고...


한참을 달려 토욕구 대협곡에 들어섰는데...온통 붉은 황톳빛이다.

화염산입구에서 베제크리크까지 10여km의 길...경치가 무척이나 아름답다...



신기하게도...토욕구계곡은 북쪽 산맥에서부터  눈 녹은 물이  투루판 분지로 흘러드는 곳으로 물이 흐르는 곳 주변에 오아시스를 형성하고 있다. 

13세기초 이슬람문화가 투루판지역에 전파되기 시작하여 14세기말 이 지역이 이슬람화 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슬람 선인으로 추종받는 7명이 투루판에서 전도를 하다가 죽은후 마자촌입구 화염산에 묻혔다고 한다.

그들이 묻힌곳에 바로 핑현사이며 둥근돔형태의 무덤은 흙으로 만들었다.

이슬람성인이 묻힌 마자촌은 중국 최대의 이슬람이자

세계적으로 7대 이슬람성지에 포함되 "동방의 메카"로 불린다.

이곳의 사진을 처음 보았을때... 어????  실크로드에 이런곳이...??? 하며 나의 못 말리는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던 곳...

사진으로 보았던 풍경앞에서...내가 살고 있는 지구가 아닌곳과 같이 느꼈었는데...그 곳에 내가 왔다...ㅋ


투루판 분지는 일년중 비가오는 날이 거의없고,메마른 사막이지만

북쪽 산악지역에서 흘러 내리는 물을

지하관계수로로 끓여들여서 포도밭과 같은 넓은 농지를 형성하는 곳도 있다고...대부분의 수로는 사막지하로 흐른다고...




"서유기"촬영때 만들어 놓은 계단길...가이드말로는 꼭대기까지 오르는데 4시간이 걸린다고...








6세기부터 13세기에 걸쳐 화엄산  토욕구대협곡 서쪽 절벽 중턱에 벌집처럼 뚫어 굴을 만들고

여러 언어로 쓰인 불경사본과 천불도를 그려놓은 베제크리크 천불동은 불교문화의 중요한 자료이다. 


토욕구 대협곡에는 현재 94개의 석굴이 남아 있으며...

이슬람세력의 지배를 받는 동안 석굴은 방치되고 그안에 벽화와 불상들은 훼손당했다.


1904년 ~1913년 천불동 벽화의 90%가 러시아,독일,영국,일본등 4개 탐험팀에 의하여 뜯겨졌다.

특히 많은양의 벽화는 독일의 "폰 르콕"에 의해 유출되었다..

1904년 11월,독일의 "폰 르콕"은 토욕구 마을에 4개월 동안 머물면서 (토욕구마을에는 그가 머물렀던 집터가 있다고...)

베제크리크 천불동과 토욕구 천불동의 석굴벽화와 불상을 집중적으로 약탈해 갔다.

"폰 르콕"이 떼어간 벽화는 독일 베를린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2차 세계대전때 폭격으로 상당수가 불타 버렸다고 한다.



나머지 띁겨진 벽화는 국외로 반출되어

독일의 베를린,인도예술박물관,러시아 성페테르부르크,한국의 국립 박물관등에 전시되어 있다(?).


이곳 벽화중 일부가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데

천불동에서 뜯겨진 벽화의 일부가 일본인 "오이타 탐험대"에 의해서 반출되었다가

우여곡절끝에 당시 우리나라 경성으로 옮겨져 마지막으로 조선총독부에 기증되었다가

해방후 유물은 서울시에 남겨졌고...천불동벽화는  국립박물관 3층 아시아관에 전시되고 있다.


베제크리크의 수난은 여기서 그치질 않고

중국의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에게 종교는 아편이라는 이유로 석굴을 훼손당하고, 벽화위에 진흙으로 덧칠을 당했다...


사람들 사이에 잊혀진 석굴은 2004년 세상에 알려 졌고... 2006년 회교마을과 석불이 사람들에게 개방되었다...


막상 개방되어진 몇 안 되는 석굴에 들어 갔을때에는

너무나 훼손이 많이 되어서 불상들은 하나도 볼수가 없었고...

벽화또한 원형으로 보존이 된 것은 전혀였기때문에 외부만 천불동 유물이지

내부 유물은 거의 많은 부분이 훼손당한 상태여서  엄청난 유물에 대한 아쉬움만 가득할 뿐...


그나마 막고굴보다는 외부벽이 원형에 가까웁게 복원되고 관리가 되는것 같아서...조금의 위안이 되었다.










석양빛을 받아 살짝 붉게 물들어 가고 있는 천불동...

천수백년전의 사람들이  천불동이라는 이름에서처럼 엄청난수의  동굴을 파고...

그 곳에 부처님을 모시고...벽화와 천정화를  그려 넣으며... 부처님 정신을 따르려 했던  처절한 몸부림이...

지금에 와서...우리가 기대감에 부풀어 석굴안에 들어갔을때 느꼈던 황당함이 떠오르며..

약탈과 파괴의 현장으로 바뀐것만 같아서 마음 한 구석이 편편칠 않았다...

다른 여행자들이 한  여름에 이곳에서 낙타를 타고 화염산에 올랐다가 엄청난 더위에 혼쭐이 났다고...


다음 일정지로 이동하는 버스차창밖으로 다시 보이는 화염산...오후빛을 받아 붉은색이 더욱더 진해 보인다...

정말로 석양빛을 제대로 받으면 불타는듯이 보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