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 박물관안으로 들러가자
아편에 대한 선입견이 나빠서 일까?
뭐라 꼭 집어 말할 수없지만 이 곳의 분위기가 마음이 편안칠 않다.
어렸을때 이곳 소식을 뉴스로... 사진으로 접할때
아편을 해서 빨갛게 물들어 있던 눈동자와 까맣게 변색된 그들의 치아가 너무나 무서웠다.
오래된 건물이기도 하지만...
일층,이층에 골든 트라이앵글과 아편에 관한 사진들과
전시물이 생각보다 많은 양으로 빼곡히 진열되어 있는데...
유독, 그 당시...
소수민족들의 사진을 보니 다시금 마음이 불편해서 바로 쳐다 보기가 싫었다.
골라서 사진을 찍었는데도
특히 몇몇 사진은 지금 보아도 싫다.
그래서 대표사진을 가장 환하고 아름다운 그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으로 했다.
바라다보니 좋다...ㅋ
부디 이 사진에서 처럼 이들 모두의 삶이 행복해져서 항상 환한 웃음만을 짓기를 바란다.
솝루악 마을로 들어서면 보물선에 앉은 대형 부처, 아편박물관, 호텔, 기념품 가게들이 줄줄이 나타난다.
관람전 점심식사...
우리나라에도 수두룩하게 있는 쌀국수집...
고수냄새를 싫어해 베트남 쌀국수집이 있으면 숨을 멈추고 최대한 빠른 속도로 지나쳤다...ㅋ
고수를 잘 먹어야 세계 어느나라 음식도 잘 먹을수 있겠다고 알고 있지만,
노력은 하질 않았었는데...
여행후기에 쌀국수가 맛났다는 글을 읽곤
과감하게 도전.
우리나라 여행객들이 많이 오는 업소라그런지...
아쉬운건지... 다행인건지는 모르겠지만,
고수가 들어있질 않아
엄청나게 강했던 버스 에어콘에 얼어있던 몸을 따뜻하게 녹여주는
따끈하고,깔끔한 맛의 쌀국수였다.
아편 박물관으로 들어가고 있어...
쿤사가 직접 살았다고 가이드는 이야기하는데,
그렇지는 않은것 같기도...ㅋ
아편의 기원.
아편의 주 원료가 되는 양귀비꽃은
기원전 1000년 중동지역에서 유래되었다.
고대 그리스,로마,페르샤시대부터 재배되어 약이나 마취 용도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의성 히포크라테스도
여러 질병 치료제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중국에는 기원전 356년 알렉산더대왕의 동방원정때 인도를 거쳐 들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약의 원료로 사용되었으나
진통이나 진정효과를 넘어 마취나 최음의 효과까지 있었기 때문에
쉽게 빠져 들었고,
한번 중독되면 헤어나오기 어려운 점을 이용,
영국이
청나라와의 무역에서 적자를 해소하기위해
막대한 양의 아편을 청나라에 뿌려 사람들을 중독시켰고,
머지않아 청나라는
아편 구입대금으로 엄청난 양의 은 유출로
청나라의 재정 궁핍을 초래하여 나라기능이 마비되기에 이르자.
청의 황제는 아편을 모두 몰수,파기하는 조치를 취한다.
이것으로...
영국과의 전쟁...즉,아편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끝났으며
청나라는 최초의 불평등 조약인 난징 조약을 체결했고,
이는 중국에 대한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발판이 되었다.
골든 트라이앵글은 태국,라오스,미얀마...
이들 세나라의 국경을 접하는 메콩강 유역의 비옥한 삼각지 지역을 말한다.
지리적 여건의 이점으로
아편단속을 쉽게 피할 수 있고,
판매루트 또한 쉽게 확장 가능하다는 점에서 유리했고,
산악지역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소수 민족의 생계 수단이어서 쉽게 근절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대단위로 재배하여 국제시장에서 고가로 아편을 팔수가 있었다.
아편에 대한 탐닉은... 결국 인간의 정상적인 사고나 일상을 망치고
폐인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이곳은 죽음의 삼각지대로 불리기도 했다고...
가파른 산비탈이나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라
산악지역의 소수민족에게는 외부와 거래할 현금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대대적으로 경작하기 시작한 시기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소수 민족들이 미얀마와 중국의 박해를 피해
태국과 라오스 국경의 산악지역으로 이주해 오면서,
양귀비 씨앗을 갖고 와 재배하기 시작했다.
인도차이나전쟁에 동원된 미군들이
전쟁의 참상과 고통을 잊으려고 구해서 피우기 시작했고,
수요가 늘면서 경작지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이전까지의 최대 생산지역이었던 중동을 제끼고 최대 공급지가 되었다.
점차...
아편값이 금값보다 비싸져 막대한 이윤을 남기게 되자.
북부 미얀마와 태국에서 살던 중공군 난민,
미얀마의 반 정부군 단체등...
여러사람이나 단체가 아편거래를 둘러싸고 싸우거나 협력하였다.
아편의 이동을 통제하는 미얀마의 군부와 군수사업에 종사하는 중국의 아편군벌은
이 지역에서 생산된 아편을 구입,
공급과 소비를 늘렸다.
그 결과,
골든 트라이앨글 산악지역의 소수민족에겐
아편재배가 전업이 되고
다른 작물은 아예 포기해 농업은 황폐해지고 모든것을 아편판 돈으로 쉽게 해결하였다.
산악지역에서 생산된 아편은 여러나라로 지나는 메콩강으로 운반되어
인도차이나해로 빠져나가 전 세계로 운반되었다.
양귀비 진액을 채취하는 모습과 도구들...
마약왕 쿤사는
태국-미얀마-라오스 접경지대의
골든트라이앵글에서 마약왕국을 건설했던 자칭 "왕관없는 왕"이었다.
1933년2월17일 미얀마 북동부 샨족 거주지역에서
중국인 아버지와 미얀마의 소수민족인 샨족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쿤사는
어릴 적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으나,
중국 공산군에 패퇴한 국민당군의 잔당으로
전투와 양귀비 재배법을 익힌뒤 미얀마로 흘러 들었다.
본래 이름이 장치푸였으나
나중에 "부유함의 왕자"라는 뜻인 쿤사로 개명했다.
전투에서 뛰어난 소질을 보인 쿤사는
30대 때인
1960년대 초반부터 골든트라이앵글을 기반으로 조직원 수를 불려 나가기 시작했다.
이곳을 근거지로
양귀비와 헤로인 생산의 실력자로 부상했으나,
1967년에 발생한 일명"양귀비 전쟁"때 큰타격을 받기도 했다.
이후
미얀마 정부군의 일원으로 일하기도 했던 쿤사는
정부군과 투쟁 중인
샨족과의 연결고리가 드러나면서
5년간 구금됐다가,
추종자들이 납치한 러시아 의사 2면과 맞교환되는 조건으로 풀려났다.
골든트라이앵글의
태국 국경지대에서 양귀비를 재배하다 쫓겨난 쿤사는
1982년 미얀마 국경지대의 호몽계곡에 둥지를 틀고
위성 TV와 학교,지대공 미사일까지 갖춘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했다.
마약 전문가들은
당시 미국에서 유통되는 헤로인의 60%는 쿤사의 마약 왕국에서
재배된 양귀비를 정제한 것으로 추산할 정도였다.
쿤사는 2007년 10월26일 양곤을 떠나 당뇨병으로 저 세상으로 갔다.
반힌땍 사람들은
그해 11월7일 쿤사 추모식을 치르며 슬픔을 달랬다.
그리고
시장통 뒤 나지막한 산속에 자리잡은
쿤사의 옛 본부를 쿤사박물관이라 이름 붙여 세상에 내놨다.
연병장에는 말 탄 쿤사 동상을 세웠고,
병영 한쪽에는 쿤사의 샨주 독립투쟁을 기리는 온갖 사진과 안내문도 붙여두었다.
그리고 쿤사는 섬뜩한 기운이 도는
어두컴컴한 옛 사무실에 밀랍인형으로 앉아있다.
인도차이나 현대사에서
가장 큰 논란을 몰고 다닌 인물이었던 쿤사는
사라지고 없지만,
반힌땍 사람들은 오늘도 떼이친처럼 쿤사에게 경의를 표한다. “
쿤사는 샨주 독립 위해 싸웠다.
쿤사 시절엔 요즘처럼 먹고 살기 힘들지 않았다.
다들 그 시절이 좋았다고 한다.”
‘아편왕’과 ‘독립투사’,
이 화합할 수 없는
두 이름을 달고 다닌 쿤사의 일생은
여전히 버마-타이 국경의 현실이기도 하다.
쿤사 뒤를 이어 세계 최대 마약군벌로 떠오른 연합와주군(UWSA)은
와주 독립을 내걸고 버마 정부군과 싸우고 있다고...
국경지역에 사는 절대 빈곤층의 삶을 해결하기 않고는
마약의 근정이 어렵다는 인식하에
태국에서는
돌아가신 왕비가 솔선수범하여
소수민족들의 일거리를 마련해 주려고 노력하였고,
미국에서도 전후 마약의 퇴지와 확산 방지에 막대한 원조를 하여
골든 트라이앵글...
특히,태국이나 라오스에서의 마약 재배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줄어 들었다고...
골든 트라이앵글 태국지역인 치앙센은 양귀비 밭이 1,000개가 넘을 정도로 대단위 재배지역이었는데,
다 태워 버리고, 지금은 쌀,옥수수,커피,고구마,생강을 재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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