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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아시아/스리랑카

캔디..부처의 치아사리를 모셔놓은 불교 사원으로 유명한 불교 성지 불치사.


캔디의 중심 호숫가에 자리 잡은 대표적인 싱할라 건축 양식의 불치사에는 전 세계 불교도들의 참배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이곳에는 부처의 치아와 진신 사리가 보관되어 있는데,

매년 8월이면 "페라헤라(치아) 축제(Perahera Festival)"가 이곳에서 성대하게 열린다.

이때 코끼리 등에 실린 부처님 치아 사리를 일반인도 볼 수 있다고 한다.

 

부처님의 치아 사리를 파괴하는 것은 스리랑카 사람들의 영혼을 파괴하는 의미..

16세기 스리랑카를 점령한 포르투칼이 치아사리를 파괴했는데, 그 것은 가짜였다고 한다.

가짜로 바꿔치기를 하여 진짜 치아사리를 지켜낸 스리랑카 사람들은 이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또한 1998년 타밀 반군에 의한 폭탄 테러가

불치사에서 있었는데(6만4천명의 희생자를 낸 힌두교 타밀족과 불교도인 싱할라족과 20년간 내전이 얼마 전 끝났다)

다행이도 불치사 입구에서 폭탄이 터져 지붕만 날아 갔다고 한다.

 

참고로 부처님의 치아사리는 스리랑카를 침략한 나라로 부터 보호하기 위해

첫번째로 이루수무니아 정사에 모셨다가

두번째로 스리마하 보리수 사원으로...

마지막으로  세번째인 캔디 불치사에 부처님 치아사리를 모셔 와 적으로 부터 지켜냈다고..

바틱공장 방문...












내 눈에 번쩍 뜨이게 예뻣던 아이들...너무너무 예뻐 고개가 돌아가도록 돌아다 보았다...

흰색옷을 좋와하는 스리랑카 사람들... 교복도 거의 흰색이 많았는데

가무잡잡한 아이들이 하얀교복을 입고 머리엔  하얀 리본을 꽂았는데

너무나...너무나...깨물어 주게 예뻣다...ㅎㅎㅎ

뒤쪽에서 걸어 오는 아이의 앞 이마위에 하얀리본 꽂은 모습은 정말로 귀엽다...

 

 

 

불치사 입구에는 몇 가지 주의할 것들이 있는데...

입구는 남,녀가 다른 통로로 들어 가게 구분을 해놓았다

반바지, 짧은 치마, 민소매 옷... 화려한 색깔의 티셔츠등을 입어서도 안 된다고 하며.

입구에서는 가방 검사도 한다...


캔디의 자랑인 불치사는 석가의 치아를 안치하고 있어 불교도인 싱할라 민족 최고의 성지인 만큼

참배자가 끊임없이 방문하고 있어 조용한 가운데 늘 붐비고 있다.
북에서 번성했던 싱할라 왕조가

남인도에서 건너온 타밀라족에게 쫓겨 남하를 계속하다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곳이 바로 이곳 불치사이다.


내부에 들어서자 만다라형식의 벽화가 눈길을 끈다.




부처님 치아사리를 처음 모신 곳은 당시 수도였던 아누라다푸라이다..

1590년 비말라 다르마 수리야 1세 왕이 캔디에 사원을 짓고 사리를 모셨다.이후 나렌드라상하 왕이 사원을 둘러싸는 해자를 파고 건물을 확장했다..

 

 

치아사리는 다고바 모야의 7겹으로 된 사리함에 들어있는데, 불치사 주지 스님외 몇 명이 사리함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7년에 한 번씩 모여 사리함을 연다고 하는데 중간에 누군가에게 사정이 생겨 한 명이라도 못 오면 치아 사리함을 여는 일이 7년 후로 연기된다니,

치아 사리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그렇게 빛을 본 사리는 황금으로 만든 연꽃 위에 놓여진다고 한다.

2500년의 봉인된 세월, 그토록 어렵게 지켜낸 스리랑카의 정신, 영혼이니 당연하다..




남녀노소 모두다 자유롭고 편안한 분위기가 이체롭다...






바라다보는 이들을 너무나 편안하게 해 주시는 부처님 모습...

4세기 인도 칼링가국의 공주가 불치를 노리는 침략자들을 피해 스리랑카로 불치를 이운하고 있는 모습을 담은 사원의 벽화.

머릿카락속에 숨겨둔 불치에서는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고 한다.

 

헤마말라공주는 남편과 함께 불치를 받들고는 스리랑카로 떠났다.

공주는 불치를 들키지 않고 인도 땅을 떠나기 위해 자신의 틀어올린 머릿카락속에 불치를 숨겨서 밤을 틈타 성을 빠져 나왔다.

 

공주부부는 간신히 배를 구해 스리랑카로 떠났지만 중도에 그만 풍랑을 만나 인도 남쪽에 표류했고

온갖 고난을 겪으며 천신만고 끝에 스리랑카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마하세나왕은 죽고 , 그 아들인 시리메가 완나(301-328)왕이 즉위한 후였다.

시리메가완나왕은 부왕의 대업이 성취된 것을 크게 기뻐하며 곧바로 불치를 모실 사원을 궁전옆에 조성하고는

왕 스스로 불치를 안치하며 성대한 공양을 올렸다고 한다.

 

이후,불치는 싱알라왕조가 수도를 옮길때 마다 함께 옮겨져 봉안됐으며

"불치가 있는 곳에 곧 왕이 있다"는 왕권의 상징이 되었다.

 

불치를 모신 자가 랑카의 지배자라는 민중의 인식은 캔디왕조가 1815년 영국에 의해 막을 내린 이후에도 뚜렸이 나타났다.

영국의 통치가 시작됐지만 민중들은 영국을 지배자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항쟁이 끊이지 않았다.

 

영국은 1818년 불치를 손에 넣은 후에야 랑카의 새로운 지배자로서 사실상의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불당의 내부에는 좌우로 그림과 함께 설명이 적혀 있어서 불치사의 히스토리를 쉽게 볼 수있다.

 

랑카섬을 침략한 포르투칼인들은

불치에 대한 싱알라사람들의 이 같은 믿음을 와해시키기 위해 불치를 인도의 고아 지방으로 가져가 부수려고 했다.

하지만 승단은 불치를 델가무의 사원에 은밀히 숨겨 두고는 가짜 불치를 포르투칼인들에게 넘겨져 위기를 모면했다.

 

이 이야기는 스리랑카 사람들에게 지금까지도 전설처럼 전해지는 영웅담이다.

 

다루마수리아왕은 바로 이때 숨겨 두었던 불치를 다시 캔디로 모셔와 봉안 했고...

불치의 캔디 봉안은 이교도의 침략과 불교 탄압에 더 이상 굴하지 않을 것이며  스리랑카에는 여전히 법등이 밝게 빛나고 있음을 상징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