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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or발칸/독일

5일차-2...헬렌킴제 성.


장신에 미남인데다가

농부들에게도 격의없이 말을 건넬 정도로 소탈한 성격이라

국민들에게는 인기가 좋았으나 신하들에게는 전혀 아니었다.

 특히 정치에 무관심한데다

바그너에 대한 팬심총애가 지나쳐서 궁정 귀족들에게 위협이 된데다가

성 만들기에 빠져서 재정이 거의 파탄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국왕의 과도한

 바그너 사랑과 건축 오타쿠다운 계속되는 축성 계획을

참다못한 신하들이 제발 그만두라고 간언했으나 끝까지 듣지 않았고

아예 궁전을 떠나 산속의 성에 은둔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말년에는 정신병자로 몰려 신하들에 의해 성에 감금당하다 강제 퇴위 당했다.

일단 국가운영 예산이 아니라

루트비히 본인의 사유재산으로 지은 성들이긴 하지만

자신의 가족들에게 엄청난 돈을 빌렸고,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다른 유럽의 왕실에서 빌리려고 했다.

당연히 내각에서 불만이 커졌고,

그것이 반목의 원인이 되었다.

강제퇴위 사유는 미쳐서 정무를 볼 수 없다는 이유였는데

정말로 미쳤었던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루트비히에게 정신병이라는 진단을 내린

굿덴 박사는 환자를 만나보지도 않고 서류만 보고서 정신병이라 진단했고,

루트비히 본인도 미치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의문의 죽음을 당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다음백과에서.




베르사이유 궁전을 본 땃다고 하지만

나름 기발한 아이디어를 가미하여 자신만의 궁전을 지으려고 했던

루트비히 2세의 천재성이 엿 보이는 궁전이다.

그러나 천재와 백치는 종이 한 장 차이...

그의 천재성 뒤에는 정신병적 요소가 있었지 않았을 까?싶은것도 사실이다.



루트비히 2세 박물관.



루트비히 2세가 왕위에 오른 시점은

프로이센이 독일 통일을 위해 박차를 가하던 시기였다.

그가 왕위에 오른지 2년 후인

1866년 결국 독일 통일의 주도권을 놓고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 발했고,

바이에른 왕국은 우호관계에 있던 오스트리아 제국의 동맹군으로 참전했으나

전쟁에 패배하고 말았다.

이후 루트비히 2세의 바이에른 왕국은

독일에서 프로이센 다음으로 강성한 나라였음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의 주도로 독일이 통일되는 과정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 밖에 없었으며,

1871년 독일제국이 성립되면서 독일 제국의 한 지방으로 흡수되고 말았다.

루트비히 2세로서는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고 할만하다.

정치보다는 음악과 미술, 문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15세에 바그너의 로엔그린을 보고 바그너의 열렬한  후원자가 되었고,

즉위 후,막대한 비용을 들여...성을 짓는 등...여러모로 국력을 낭비하였다.

원래 예술에 관심이 컸던데다가

즉위 후

어떻게 해 볼 도리도 없이 나라가 기울어가는 상황 속에서

정치를 외면하게 되고...더 더욱 예술과 건축에 빠져들게 된 것으로 보인다고.



오스트리아 여제의 동생인 쇼피 샤를로와 약혼,결혼 날짜까지 정해 놓고

황금마차와 기념주화까지 준비했지만

결혼식을 이틀 앞두고 돌연 파혼을 해 버렸다고...
















놀라움을 금치 못 했던...

그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었던 마이센 도자기로 만들어진 갖가지 소품들과 거대한 샹들리에...












로열블루 방으로 들어가는 문에도 이렇게 마이센 도자기 소품으로 휘 감았다.

이 궁전의 수많은 마이센 도자기 소품들은 1년에 한번씩이라나?

마이센 도자기에서 관리차원으로 청소를 하러 온 다고...


은둔자의 삶을 위해 섬가운데 자신이 동경한 태양왕 루이 14세의 성을 따라 지었던 루트비히 2세.

그의 대인 기피증은 기발한 발상으로 표출되었는데

아랫층과 연결된 침실벽 숨겨진 방이라든지...

지하 주방에서 만들어진 음식들로 차려진 식탁을

자신의 방으로 바로 올릴 수있겠금 설계한"식탁 엘리베이터"장치등이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