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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럽or지중해/스페인

9일..천재적인 건축가 가우디의 마지막 작품인 성 가족 성당..

 

 

천재 건축가 가우디의 열정을 쏟아 붓고...

잠들어 있는 성 가족 성당.

 

1886년에 착공하여 현재진행형 건축물.

유럽을 다니다 보면 몇 백년이라는 긴 시간을 공들여 건축했다는 대 성당을 많이 보아왔는데,

성 가족성당은

우리가 사는 이 세대에 지어지고 있는 대성당이란 생각에

건축자 가우디와 함께 남다른 관심과 애정이 가는것은 당연할 것이다. 

 

20세기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불리우는 가우디의

작품 중에서도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건물이며,

1918년 이후부턴

오로지 이 건축에만 매달렸고 집과 작업실도 그 건설 현장으로 옮겼다.

 

이 성당은 가우디 건축의 정점에 해당하며,

그의 모든 경험과 혁신의 집적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성 가족성당은

성당 입구인 정면쪽(동쪽)과 출구인(서쪽)이

전혀 다른 분위기로 건축되고...되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입구는 가우디가 평생을 바쳐서 건축하고,출구는 수바라치라는 건축가가

가우디의 의지를 이어받아 현대적인 모습으로 재 해석하여

얼마전 건축을 완성해 놓았다고...

 

가우디는 성 가족 성당 사그라다 파밀리아에 세 개의 파사드를 만들었다.

공사가 끝난 동쪽은 ,탄생의 파사드..

가우디가 사망시 공사 중이었던 서쪽은 ,수난의 파사드이다..

사망후 지금 현재 공사 중인 남쪽은, 영광의 파사드..

가우디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첨탑이 빠진 탄생의 파사드만 완성된 상태였다.

이 파사드의 중앙 문은 사랑, 오른쪽은 믿음, 왼쪽은 소망의 문이다.

 

 

 

 

 

 

 

 

 

 

 

170m 높이의 중앙탑 좌,우로 아름다운 곡선을 자랑하는 4개의 탑과

그리스도의 탄생을 그린 조각들이 이색적이다.

지하 예배당은 현재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교회 건축에 관한 자료들과 가우디의 묘도 이곳에 마련되어 있다한다.

 

 

 

 

 

 

                         

 

 

 

 

 

 

 

 

 

 

 

 

 

 

 

 

가우디의 마지막 작품인 성 가족 대 성당은
예수와 성 요셉과 성모 마리아를 위한 성당으로

예수의 탄생과 수난,영광의 세월 등 예수의 일생을 묘사하고 있는 조각품들로 유명하다.

 

동쪽문으로 입장 하는데 외관 면저 촬영...

탄생의 파사드.가장 먼저 시공..

마리아에게 천사 가브리엘이

처녀의 몸으로 예수를 임신했다는 것을 알리는 장면인

수태고지와 성모마리아의 대관식 장면이 조각되어 있고

 

 

 

 

 

 

 

 

 

 

 

 

 

 

 

 

 

 

                                 

 

 

 

 

 

 

 

 

 

이것으로 성 가족 성당 내부 관람을 마치고 나와서...

 

서쪽 출구..수난의 파사드.

 

외벽 조각 작품에 대해 현지가이드의 설명이 이어지고... 다시 또 뒷 목이 결리도록 올려다 보아야 했다...

 

가우디가 건축을 짓다가 사망을 하고

그 뜻을 이어받아 추가적으로 작업을 하고 있어

최근 작업한 조각물과 가우디가 작업한 조각물이 색상이 다르다.

 

당연히 가우디가 건축한 정면부분을 높이 평가하지만 

최근에 완성된 출구쪽도

간결하지만,

성경의 내용을 상징한다는 여러 조각상들을 바라다보다 보니

정면과는 또 다른 감동이 밀려온다.

 

 

 

 

예수님과 입을 맞추고 있는 유다..

 

 

 

 

성 가족 성당에는 가우디의 비밀코드가 숨겨진 것으로도 유명하다.

성당 벽면에 새겨진 마방진은 4가지 숫자를 어떤 조합으로 더해도 그 합이 33이 된다.

33이란 숫자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의 나이.

 

또 마방진 속 중복된 숫자 10과 14를 모두 더하면 48이 되며,

이 수를 알파벳에 대입하면 예수를 뜻하는 ‘I.N.R.I’라는 글자가 된다고 한다.

 

 

이밖에 예수의 12제자를 상징하는 12개 종탑과

예수를 상징하는 가장 높은 중앙탑 등 성당 곳곳에는 ‘가우디코드’가 숨겨져 있다.

 

 

 

 

 

 

 

 

 

 

 

 

 

 

 

 

 

 

 

 

 

 

 

<안토니 가우디의 생애>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í)는 1852년 6월 25일

에스파냐 북동부 카탈루냐의 타라고나 지방  레우스에서 구리세공장의 집안에서 태어나 17세 때부터 건축을 공부하였다.

그의 어린시절은 관절염으로 인해 병상에 누워있었던 시간이 많았기에 친구를 사귈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에게 관절염은 오히려 그를 건축의 대가로 키울 소중한 기회였다.

그는 병상에 누워 자연을 관찰하고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갖게 되었고 자연으로부터 평온과 영감을 얻었다.

동시에 고향 카탈루냐의 옛 유적들을 통해 건축에 대한 꿈을 키웠다.

 

 

 

 

"내가 공간을 느끼고 보는 재능을 갖게 된 것은 아버지와 조부와 증조부가 모두 주물제조업자였기 때문이다.

몇 대를 거쳐 내려오면서 건축가인 내가 만들어진 것이다.

주물제조업자는 표면으로 부피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전에 이미 공간을 본다.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의 위대한 예술가들도 설계도면에서 시작하여 부피를 창조해내는 조각가들이었다...

" 가우디는 자신의 재능을 타고난 유전자 덕분이라고 밝힌다.

 

 가우디는 비록 가난한 집안에 병약한 소년으로 자랐으나 건축에 대한 관심은 남달랐다.

바르셀로나의 건축학교를 졸업할 때

학장 엘리아스는 “우리가 졸업장을 바보에게 준 것인지 천재에게 준 것인지 누가 알리요. 시간이 말하리라.” 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교수들 사이에서 논쟁과 호불호가 확실하게 갈리는 독창적인 가우디의 학교생활을 짐작케 하는 말이다.

 

가우디는 졸업 후부터는 독자적으로 일을 시작,

‘가우디 건축의 성지’라고 불리는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많은 독창적인 건축을 남기고 1926년 6월 10일 사망하였다.

 

그는 구엘 공원 안의 작은 집에서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며,

3일 전인 6월 7일 산책 중에 전차에 치인 사고에서 회복되지 못하고 7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사고 당시 그의 누더기 옷과 빈 주머니 때문에

많은 택시 운전사가 그가 요금을 지불할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에 그들 태우기를 거부했다.

그는 결국 바로셀로나의 한 병원에 옮겨졌으나

다음날 그의 친구들이 그를 찾기 전까지는 가우디를 알아보지 못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그들이 그를 좀 더 좋은 병원으로 옮기려고 했지만 가우디는 "나는 여기 가난한 자들에 속하네." 라며 거부했다고 한다.

 

「성가족 성당」은 돌과 종교와 예술이 삼위일체를 이루는 작품으로, 가우디 스스로 속죄사원이라고 칭하면서 건축하는 과정을 자기희생의 과정으로 생각했다고 전해진다. 성당 전체는 '돌로 만들어진 성서'로서 장인들이 직접 손과 연장으로 성서에 기록된 장면들과 가르침 등을 장식과 상징들로 구체화시키고 있다. 가우디는 넘쳐나는 빛 속에 성스러운 조각들과 음악이 있는 성당이 되길 희망했으며, 그래서 모든 부분에 하나하나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려고 애썼다.

 

 

1883년부터 1926년까지 43년간 가우디의 일생은 「성가족 성당」 공사에 전부 바쳐졌다.

특히, 마지막 10년은 작업실을 아예 현장 사무실로 옮겨 인부들과 숙식을 함께했다.

이 당시 가우디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차례로 잃는 극도의 슬픔을 이겨내야 했다.

속세에 미련을 버린 듯 성당을 건설하면서 가우디는 종교에 모든 것을 의지했고, 이런 성향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가우디의 모든 열정이 승화된 곳은 바로 그의 작업실이었다.

그러나 가우디는 살아있는 동안 「성가족 성당」을 완성할 수 없음을 스스로 알았고,

가우디 자신도 알지 못할 먼 훗날을 기약하며 설계와 시공을 해야만 했다.

 

가우디가 죽은 지 3년 후에 그가 구상한 「성가족 성당」의 전체 도면이 확정 발표되었다.

그 후 「성가족 성당」은 가우디의 작업을 계승하는 건축가들의 기술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하나님은 가우디의 영원한 후원자로서, 가우디가 떠난 지금도 「성가족 성당」은 그의 보호 속에 여전히 지어지고 있는 것이다. 건축가 없이도 1년에 100만 명 이상의 방문객을 끌어들일 만큼의 관심 속에서 지어지고 있는 「성가족 성당」이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아마도 이는 스스로 가슴속에 울리는 소리에 귀 기울여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후원자 구엘 백작>

구엘이라는 부자가 가우디의 이상적인 후원자였다.

직물업계의 거장으로 큰 부를 이루었는데 그는 자신의 재산을 가우디가 천재성을 발휘하는 데 투자했다.

그의 이름이 붙은 별장, 궁전, 공원은 가우디의 재능이 십분 발휘된 탁월한 작품들이다.

 

경제적인 후원을 구엘로 부터 받았다면,

건축학적으로는 이슬람의 건축 양식과 아르누보 그리고 뒤크의 이론서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뒤크의 <프랑스 건축사전>은 자신에게 많은 영감을 준 책이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가우디는 뒤크의 가르침을 모든 독창적인 예술가들이 그러하듯, 자신만의 개성으로 수정 보안한다.

뒤크의 책을 통해 습득한 고딕양식은 '테레사 학원'의 모든 층에서 잘 나타난다.

테레사 학원은 청빈한 수도사들의 건물답게 가우디의 작품 중 비교적 저렴하게 만든 건축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독창적인 건축기법이 잘 살아있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가 환경을 생각하는 바도 남달랐으며,

당시 그가 사용한 건축자재들은 재활용품이 많았다.

그가 사용한 세라믹 제품(타일, 도자기, 벽돌)등은 모두 재활용품이다.

완제품을 구매하여 깨트려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타일공장, 도자기공장에서 잘못된 제품의 깨트린 잔해를 수집하여

테라코타형식과 꼴라쥬형식으로 시공한 것이다.

 

가우디는 교황청의 특별 배려로 성자들만 묻힐 수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지하에 묻혔다.

가우디는 건축의 성자이면서,

실내 디자인과 장식 조각, 심지어 의자와 화장대에 이르기까지 제작한 20세기의 독창적인 예술가이다.

 전 작품에 드러나는 우아하고 기괴한 곡선과 다양한 자연의 이미지를 이용한 그의 '집'들은

 피카소의 그림과 견줄 수 있다.

그의 거대한 영혼과 작품은 당대보다도 세월이 지날수록 더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이다.